“기다렸다는 듯이 모두들 줄을 서 있었다”
1993년 7월 7일, 서울 종로구청 앞.
8평 남짓한 작은 가게가 문을 열었다. 간판에는 도시락이라는 낯선 이름이 걸려 있었다. 대한민국 외식 산업의 새로운 장(章)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도전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냉담했다.
‘도시락을 사먹는다’는 인식이 없던 시절, 음식을 포장해 가는 테이크아웃 문화조차 생소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망할 게 뻔하다”
“특히 남자들 반대가 심했죠. 음식을 담은 봉투를 들고 다니는 걸 창피하다고 여겼거든요. 도시락 테이크아웃은 100% 실패할 거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영덕은 그 편견 속에서 오히려 확신을 봤다.
"모두가 안 된다고 하니, 더 하고 싶더군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었지만, 한국도 언젠가 일본처럼 도시락이 일상이 될 거라 믿었습니다."
‘떡은 떡집에서’ 철저한 분업
첫 번째 전략은 ‘입지 선정’이었다.
서민을 겨냥한 저가(低價) 도시락은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다. 그는 명동 거리 같은 1등지보다는 유동 인구는 많지만 임대료가 낮은 2등지 상권을 택했다. 식당이 많고 저렴한 메뉴가 주력인 지역. 종로구청 앞 피맛골 골목의 8평 가게는 그 조건에 완벽히 들어맞았다.
두 번째 전략은 ‘분업’이었다.
그는 '떡은 떡집에서'라는 분업 철학을 1호점부터 철저히 지켰다. 돈가스는 돈가스 공장에, 햄버그는 햄버그 공장에 맡겼다. 일본에 수출하던 최고 품질의 제조업체들이었다. 물류 역시 위탁했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프랜차이즈 본사가 직접 제조와 물류를 도맡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영덕은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 위탁하는 구조가 가장 효율적이라 봤다. 균일한 품질을 유지하면서도 협력업체, 가맹점, 본사 3자가 동반 성장하는 구조.
이 철학은 지금까지도 《한솥》경영의 근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1500원 굴비 도시락의 비밀
문제는 ‘규모의 경제’였다. 1호점의 미미한 주문량만 보고는 어떤 업체도 좋은 조건의 납품가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때 이영덕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식자재 업체 대표들을 일본으로 직접 데리고 갔다. 수천 개 점포가 성업 중인 일본의 도시락 거리를 보여주며 선언했다.
"우리가 앞으로 이렇게 될 겁니다. 지금 1호점이 아니라, 미래의 수백 개 점포를 보고 가격을 제시해 주십시오."
대표들은 거리마다 늘어선 도시락 가게들을 보면서 경탄했다. 그리고 이영덕의 비전을 믿고 '미래의 가격'으로 손을 잡았다. 그때 파트너가 된 업체들 중 상당수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래를 이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메뉴가 970원짜리 '콩나물 비빔밥'이었다. 천 원짜리 한 장으로 한 끼를 해결하고, 남은 30원으로 공중전화 한 통까지 할 수 있었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세상을 놀라게 한 메뉴가 있었다. 바로 1,500원짜리 '영광굴비 도시락'이다.
“전남 영광에 가보니, 크기가 작은 굴비들은 애물단지 취급을 받더군요. 그걸 몽땅 《한솥》에 납품해달라고 했습니다.”
상품성이 없어 남아돌던 굴비가 도시락이란 새로운 시장을 만나 상생의 메뉴로 거듭난 것이다. 처리에 골머리를 앓던 생산자도, 질 좋은 식재료를 확보한 《한솥》도 모두가 이익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고급 식재료의 대명사였던 굴비가 파격적 가격에 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오픈 첫날, 울린 전화벨
모든 준비는 끝났다. 6개월간 일본에서 현장을 익힌 이강영 점장을 중심으로, 현지 연수를 받은 주방 여사님 세 명이 진용을 꾸렸다.
“도시락은 현장에서 배우는 것”이라는 이영덕의 철학 아래, 매장은 일본 도시락 전문점 시스템으로 설계됐다. 주방 동선, 설비, 조리기구까지 혼케가마도야 레이아웃을 그대로 옮겨왔다.
다만 메뉴만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새롭게 구성했다. 콩나물밥, 영광굴비처럼...
이영덕은 오픈 첫날 일부러 가게에 가지 않았다. 현장은 현장 책임자에게 맡긴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예상 판매량은 200개. 그 정도면 성공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전 10시 30분, 사무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강영 점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뚫고 나왔다.
"사장님, 난리 났습니다! 가게 앞에 줄을 섰어요. 전화 주문도 쏟아집니다. 빨리 와서 도와주십시오!“
가게로 달려가 보니, 골목 끝까지 이어진 대기 행렬이 보였다. 매장 안은 전쟁터였다. 밥솥은 바닥을 드러냈고, 식재료는 동이 날 지경이었다. 오픈 첫날 《한솥》의 판매량은 예상의 다섯 배, 무려 1천개에 달했다. 종로구청 앞 8평짜리 작은 가게는 그날, ‘도시락’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고 있었다. (제9화에서 계속)
[서울=이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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