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서울 생활을 정리한 이영덕은 남행열차(南行列車)에 몸을 실었다. 세 번의 사업 실패를 안고 떠나는 길. 차창 밖 들판은 푸르렀지만, 청년사업가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칙칙폭폭’ 기적 소리는 마치 패배한 장수의 퇴각 북소리처럼 울려왔다. 꼬박 여섯 시간을 내달려 다다른 종착역, 플랫폼에 발을 내디디니 짠 내 섞인 바람이 코끝을 찔렀다. 한국에서의 인생 세 번째 막이 남쪽의 항구도시 여수에서 열리고 있었다.
韓日을 이어준 JC 리더
여수 생활의 돌파구는 'JC(청년회의소)'였다. 그곳은 단순 친목 모임이 아니라 지역을 움직이는 젊은 경영자들의 네트워크이자 리더 공동체였다. 어느 날 회원들에게 아버지의 오랜 숙원이던 호텔 나이트클럽 허가 문제를 꺼냈다.
"아시다시피 저희 호텔이 여수고등학교와 담벼락을 마주하고 있는데, 좀처럼 학교 허가를 못받고 있습니다. 적자를 벗어나려면 나이트클럽이 필수인데 말이죠.”
순간 한 회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학교 교장 선생님이 제 은사십니다. 제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이어 다른 회원들도 “우리 동문들이 나서야지”라고 거들었다.
며칠 뒤 굳게 닫혀있던 문이 거짓말처럼 열렸다. 학교로부터 ‘오케이 사인’이 나온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사업은 자본과 아이디어만으로 되는 게 아니구나, 신뢰와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당시 여수는 호남 제일의 부자 도시였다. 남해바다에서 건져 올린 해산물과 그걸 활용한 가공업, 밤 항구에서는 암암리에 밀수가 성행했다. 거기다 전라도의 푸짐한 인심과 경상도의 억센 기질이 뒤섞여 살다보니 뭔가 분주하고 언제나 생기가 넘쳐났다.
특히 매료된 건 음식이었다. 싱싱한 해산물과 갓 수확한 농산물로 차려낸 여수 밥상은 맛의 고장 ‘교토 보이’에게도 최고의 밥상이었다.
이영덕의 진가는 바다 건너에서 빛을 발했다. 여수JC가 일본 규슈의 가라쓰(唐津)JC와 자매 결연을 맺을 때, 그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다.
단순한 통역이 아니었다. 양국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분위기를 조율하는 외교관이자 사회자였다. 능숙한 언어와 재치 있는 진행에 일본 대표단은 감탄했고, 여수 JC회원들은 자부심을 느꼈다. 이어 여수시가 가라쓰시와 결연을 맺을 때도 그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했다. '여수의 인재'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길, 어머니의 큰 뜻
여수에서의 성공에 안주해가던 1978년, 아버지 이판술 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행기 좌석 6개를 뜯어내 침상을 만들어 아버지를 교토 병원으로 모시며 효도를 다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강인했던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그는 ‘홀로서기’를 해야 할 때가 왔음을 실감했다.
 | 대학시절 어머니와 함께 | 아들의 성장을 누구보다 바라던 이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뜻밖에도 채찍을 들었다.
“너는 왜 시골에서 안주하느냐. 어릴 적 주산학원도 못가게 한 내 뜻을 잊었느냐. 나는 너를 남의 장부 정리를 하는 경리 부장을 키우려고 한국까지 보낸 게 아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83년, 여수관광호텔에 대형 화재가 일어났다. 절망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이번에도 회초리를 들었다.
“호텔을 수리하지 말고 팔아라.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라.”
어머니의 꾸지람은 ‘큰 인물이 되라’는 평생의 메시지였다. 화재는 여수를 떠나야 한다는 신호 같았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 무역업에 재도전했지만, 결과는 또다시 실패였다. 십수 년의 세월, 수많은 도전.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왜 나는 매번 실패하는가?’
답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한 그때, 그의 발길은 다시 그를 일으켜준 땅 여수로 향했다.
이른 새벽, 바다를 향해 선 암자 향일암(向日庵)에 올랐다. 수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태양이 솟아오르는 장엄한 광경 앞에서, 이영덕은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가. 옷, 우산, 무역… 모두 얄팍한 장사였다. 사람도, 돈도, 시스템도 몰랐다. 이제 모든 것을 버리자. 가장 낮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자. 바닥에서 길을 묻자.’
그 다짐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처절한 성찰이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그의 앞에는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가 놓여 있었다. (제6화에서 계속)
[서울=이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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