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산골에 심은 교육의 씨앗, 40년을 꽃피우다
"내 생애 가장 잘한 일은 학교를 세운 것입니다."
한일협력위원회 이사장이면서 롯데관광개발 회장 겸 미림학원 설립자인 김기병(金基炳) 이사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IMF외환위기, 기업 법정관리, 코로나 팬데믹... 숱한 시련 속에서도 지난 40여 년간 학교를 지켜낸 삶은 '인재를 키워 나라에 보답한다'는 육영보국(育英報國) 신념의 실천이었다. [서울=이민호]
 | 김기병 설립자, 미림학원의 상징색인 초록색 타이를 애용한다 |
교육 불모지에 심은 '인재 양성'의 씨앗
1938년 북한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기병 미림학원 이사장은 9살의 나이에 월남했다. 경기고와 한국외대를 졸업한 뒤 공직에 입문했다. 장기영 경제부총리의 비서관으로 일하며 제3~5차 경제개발계획에 참여, ‘한강의 기적’의 초석을 다졌다.
하지만 그는 1973년 장래가 촉망되던 관료직을 내려놓고, "나라에 부족한 외화를 직접 벌겠다"는 마음으로 관광업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설립한 롯데관광은 “한국관광의 길을 닦은 기업’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대한민국 대표 관광브랜드로 성장했다.
기업가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그가 꿈꾼 또 다른 형태의 보국(報國)은 교육이었다. "참된 민주국가는 복지사회의 건설로 이룩할 수 있으며, 이는 교육으로 길러낸 인재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신념 아래, 1978년 4월 학교법인 미림학원을 설립했다.
주변에서는 왜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인 신림동에 학교를 짓는지 의아해했다. "왜 하필 신림동이냐", "남고를 세워야 야구부, 축구부를 만들 수 있지 않느냐“라는 만류도 받았다.
당시는 강남 개발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왜 유혹이 없었겠습니까”라고 회상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소외된 지역에 배움의 기회를 주자, 여성 인재가 많아져야 국가가 발전한다"는 소신이었다. 그렇게 신림동 산골에 여고의 문을 열었다.
위기에도 흔들림 없는 '육영'의 소신
김기병 이사장의 학교 사랑은 각별했다. 개교 이래 단 한 번도 재단 전입금을 거른 적이 없다. 1998년 IMF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휘청일 때도, 2013년 용산 개발사업이 무산되며 회사가 법정관리 위기에 내몰렸을 때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 관광산업이 올스톱된 시기에도 그는 학교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사업이 어렵다고 교육을 포기할 거라면 애초에 시작도 안했을 겁니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헌신은 학생들의 빛나는 성과로 돌아왔다. 1985년 4회 졸업생이 전국학력고사 전체수석을 차지했고, 이화여대 수석 입학생도 두 차례 나왔다.
시대를 앞선 교육, 여성 오케스트라와 IT전문고
김 이사장의 교육 철학은 시대를 앞서갔다. '1인 1악기'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1982년, 미림여고에 밴드부를 창설했다. 이는 국내 유일의 여성 관악오케스트라단 '코리아 우먼스 윈드 오케스트라(KWWO)'로 발전했다.
이 오케스트라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을 빼고는 매년 연주회를 개최해왔다. 88서울올림픽 기념공연은 물론 일본, 미국, 호주 등 해외 밴드와도 교류하며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KBS홀 등 한국 최고 수준의 공연장 무대에 오를 만큼 실력도 인정받았다.
1991년에는 국내 최초의 여자 IT전문고인 미림여자전산고(현 미림여자정보과학고)를 설립했다. 그는 “세상이 변하는 걸 느꼈고, 아이들에게 세상을 넓게 보는 힘을 길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정보과학고는 100%에 가까운 취업률 성과를 기록하며 여성 IT 인재 양성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꿈을 선물해준 사람”
2019년 개교 40주년을 맞아 졸업생들이 전한 감사패 문구에는 그의 교육철학이 고스란히 담겼다.
"젊은이들에게 꿈을 주자. 꿈을 생각하고 그 꿈을 키워 꿈을 빛나게 하는 일만이 우리 모두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 그러한 설립자님의 소망대로 저희는 꿈을 꿀 수 있었고, 그 꿈을 키워 빛날 수 있었습니다“
신림동 산골 언덕에 세운 작은 학교는 어느새 2만7천5백 명(여고 2만1천명, 정보과학고 6천5백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명문사학으로 성장했다. 교육을 통한 사회 기여라는 초심은 지금도 미림이라는 이름 아래 이어지고 있다.
김기병 이사장의 육영보국 정신은 지금도 청소년들의 꿈속에서 살아 숨 쉰다. 이는 우리나라(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재의 숲, 미림(美林)을 가꾸겠다는 그의 소박하지만 단단한 약속처럼 교정 곳곳에서 맑게 빛나고 있다.
 | 미림학원(서울 관악구)의 현재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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