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식당은 공장 배꼽에 세워라”
일본 전후 최대 도산
1974년 설날에 일어난 윤성방적 화재는 불운의 전조였다. 일본당국은 바로 압박에 나섰다. 윤성방적 설립 때 일본 내 재산을 국외 반출했다면서 트집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외국인 투자법인으로 정식절차를 거쳐 인가받은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당국이 나선 이후 일본여론은 급속히 부정적인 기류로 바뀌고 있었다. 거래 은행들은 일제히 사카모토방적에 대해 융자금 회수에 돌입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 마냥 일사천리로 압박이 가해졌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1차 요일쇼크까지 터졌다. 면방의 원료인 원유가격이 폭등하면서 수익성은 악화됐으며, 경기불황 속에 판매 역시 침체됐다. 급기야 1974년 9월 사카모토그룹은 3억 엔의 어음을 막지 못해 도산하고 말았다. 총 부채규모는 640억 엔, 금액 기준으로 전후(戰後) 일본최대 규모의 도산이었다.
‘방적왕’으로 불렸던 한국인 기업이 이렇게 허무하게 일순간 무너질 수 있는가? 이 상황을 서갑호 주변 뿐 아니라 재일동포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도처에 수많은 부동산 자산을 갖고 있었지만, 은행들은 그걸 담보로 받지 않았다. 충분히 빚을 갚을 수 있는데도 못갚게 만든 것이란 주장은 흘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제 남은 희망은 모국 대한민국이었다. 서갑호 역시 모국에서의 재기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국도 그의 편은 아니었다. 역시 일제히 융자회수가 이뤄졌고, 언론들은 연일 “김치 못먹는 일본식 미소시루 먹는 사카모토”등 돈을 떼일지 모른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결과적으로 서갑호는 보유자산을 대거 매각해 은행 빚을 전부 탕감했다. 재벌 중에서도 가장 재정이 탄탄했던 방림방적, 세파에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1976년 11월 21일, 재기에 혼신을 다하던 서갑호 사장이 갑자기 별세했다. 필리핀 출장에서 귀국하던 날밤, 서울 삼청동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급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졌다. 가벼운 감기 증상이 있었을 뿐 병세가 악화될 줄 몰랐다는 게 가족들의 증언이다.
“식당은 공장 배꼽에 세워라”
서갑호의 일본식 이름은 사카모토 에이이치(阪本榮一). 한국은 그를 두 개의 자아로 보았다. 한편으로는 동포로,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인 취급을 했다. 60~70년대 한국 언론이 묘사한 그를 보면 서갑호와 사카모토를 혼재해서 썼다. 어떤 일간지는 서갑호가 김치를 싫어해서 사시미와 미소시루가 없으면 밥을 못먹는다는 뜬소문까지 퍼뜨렸다. 그의 가족들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된장찌개와 깻잎, 추어탕을 즐기는 평범한 한국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
모국의 경제발전을 돕기 위해 헌신한 기업인 서갑호와 한국 경제계를 장악하려는 일본의 침략자 사카모토... 모국투자를 발벗고 나선 그는 숱한 모함을 당했다.
윤성방적 설립 때는 일본에서 폐기하는 방적기를 갖고 왔다는 의심을 사서, 민관 합동 진상조사까지 벌어졌다. 정부와 은행, 대한방적협회 3개 기관이 합동조사팀은 오사카와 구미에서 현지 실사를 벌였다. 이후 그들은 말문을 닫았다. 사카모토 방적기보다 윤성방적 방적기가 신식이었고, 심지어 자동화 설비까지 갖춘 첨단시설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착취 기업이란 부정적 인식 역시 모함이었다. 방적업 특성상 근로자 다수는 여공으로 불리던 젊은 여성들, 싼 임금으로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꼬리표가 달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서갑호 회사에는 다른 데에는 없는 복지시설이 있었다. 학교였다. 상경한 젊은이들을 위해 영등포 공장 안에 ‘방림여고’를 세웠다. 낮에는 일하지만 밤에는 공부를 하라는 배려였다. 수업료 무료. 비용을 회사가 부담한 것이다.
서갑호 회사의 차별점은 직원식당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식당은 공장 정중앙에 세웠다. 동종업계 다른 회사들은 후미진 곳에 세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직원식당은 배꼽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식구들이 언제든 쉽게 배를 채울 수 있지요. 든든해야 일도 잘하지 않겠습니까.”
직원식당은 서갑호의 단골식당이었다. 약속 없는 날, 점심시간 거기에는 그도 있었다.
“밥 묵었나?”
툭 내뱉는 듯한 경상도 사투리는 서갑호 사장의 인사법이었다. [서울=이민호]
* 지원 : 「재외동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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