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재일동포 대명사 ‘서 갑 호’
1974년 1월 23일 설날 오후.
경북 구미 근방은 시커먼 연기와 잿가루가 번지면서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여파로 구미공단 옆을 지나는 경부고속도로는 종일 정체를 빚었다. 공단 내 최대규모의 공장 「윤성방적」에 화재가 일어난 것이다.
“치솟는 불꽃의 열기가 공단 내 쌓였던 눈을 모두 녹였고, 공장지붕이 내려앉는 폭음은 6k  | 서갑호 사카모토방적 창업주 | m나 떨어진 구미읍까지 들렸다.”
(1974.1.24. 매일경제)
윤성방적 대표는 오사카 「사카모토방적」 창업주, 재일동포 1세 서갑호(徐甲虎, 1914~1976, 호적상 1915년생). 경남 울주군 삼남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4세 때 홀로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에서 첫발을 디딘 데는 후쿠오카 모지코항. 허름한 삼베옷 차림에 한눈에도 바다를 건너온 조선인 소년 서갑호. 훗날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이름을 떨치는 유명인사가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일본살이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폐품회수, 사탕팔이, 껌팔이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심지어 똥장군(정화조 청소부) 일도 했고, 똥지게를 짊어지고 다니며 남의 집 밭에 거름을 주고 품삯을 받았다.
누구보다 부지런했던 서갑호, 하늘도 그걸 알았을까.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보던 한 일본인 소개로 오사카 센슈에 있는 타월공장 ‘신토(新東)’에 취업한다. 비록 자그마한 수건공장 견습생이었지만 첫 취업이었다. 거기서 베 짜는 기술을 터득했고 돈을 모아 자기 회사를 차리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 3월, 서갑호는 자기이름(일본식 이름: 사카모토)을 내건 ‘사카모토방적(阪本紡績)’을 창업했다. 가진 돈이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남들이 고물상에 고철로 내다버린 부품들을 구해서 방적기를 만들었다.
‘덜커덕 덜커덕~’
당장 멈춰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폐방적기를 재조립해 시작한 방적사업. 그런데 그건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6.25한국전쟁 발발로 군복 수요가 급증하면서, 방적공장에서 만든 직포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리고 전쟁의 총성이 멈춘 1955년에는 오사카방적, 히타치(常陸)방적까지 모두 3개의 회사를 거느린 방적그룹 오너가 됐다.
당시 서갑호는 일본 재계에서도 손꼽히는 기업인 중 한 명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소득세 기준으로 보면 오사카 1위였고, 일본 전체에서도 다섯손가락 안에 들었다. 그때 붙여진 별명이 ‘방적왕’.
1950년대 일본에서 한국인이 일본 주류사회에 진입한다는 건 꿈도 못꿀 일이다. 재일교포 차별은 일본사회의 불문율이었고, 노골적으로 ‘조센진 카에레’(조선인은 너희 나라로 돌아가)가 통용되던 시절이다.
한국인은 대학을 졸업해도 출신과 국적에 발목이 잡혀 일자리를 구할 수 없던 50~70년대, ‘서갑호’ 이름 석 자는 일본에서 성공한 한국인의 대명사였다. [서울=이민호]
*지원: 「재외동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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