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未청산 역사의 그늘… 후손에게 책임 묻는 것은 정의인가?
“나는 내 증조부 성함은 물론이고 어떻게 살다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모른다. 사진을 본 적도 없다. 할아버지 삶도 모르는데 증조부 삶을 아는 후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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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하영 |
배우 하영의 ‘증조부 친일 의혹’을 둘러싼 논란이 연예계를 넘어 한국사회의 오래된 질문을 다시 끌어냈다. 100년 전 조상의 행적에 대해 후손이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문제다.
논란은 지난 7일 KBS 프로그램에서 하영이 “증조할아버지께서 한양(현 서울) 최초로 양의원을 개원했고 고종 황제를 진료했다”며 4대째 의사 집안이라는 가족사를 소개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그의 증조부 안상호가 1916년 친일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 평의원 명단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기록이 확인되자 하영은 12일 자필 사과문을 내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증조부의 친일적 행적을 알게 됐다”며 가족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이야기한 것을 반성한다고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하영을 모델로 기용했던 기업들이 줄지어 광고 노출을 중단하거나 비공개로 전환한 것. 인터뷰 등 홍보 일정도 취소됐다.
“조상의 죄를 후손이 책임져야 하나”
친일 행적이 확인된 조상을 후손이 미화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은 타당한 면이 있다. 가족사를 소개하면서 조상을 영웅처럼 이야기했다면 당사자의 역사 인식에 대한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상의 행위와 후손의 책임은 별개의 문제다. 하영이 증조부의 행적을 선택한 것도 아니고, 그 시대에 살지도 않았다.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대정실업친목회 소속이라는 사실만으로 해당 인물을 ‘친일파’로 단정하는데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친일 여부를 평가하려면 그 인물의 구체적인 활동과 행적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연좌제(連坐制)’는 범죄나 반역 등의 행위를 한 사람뿐 아니라 그 가족이나 친족까지 함께 처벌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제도다. 한국 헌법 제13조 3항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하영 사건에서 나타난 광고 중단이나 여론의 비판을 법률상의 연좌제와 동일시할 수는 않다. 다만 조상의 행적을 근거로 현재를 사는 후손에게 친일파로 낙인을 찍거나 불이익을 가하는 건, 연좌제의 폐해를 떠올리게 한다.
친일 未청산이 남긴 역설
그렇다고 이번 논란을 단순하게 ‘과거를 들춰내는 마녀사냥’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해방 후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면서 친일 인사들의 권력과 부가 후손에게 전해진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결국 다음 세대의 숙제가 된다. 하영 사례 역시 ‘부(負)의 유산’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후손에게 조상의 죄를 물을 것이 아니라, 무엇이 사실이고 어떤 행적이 있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먼저다. 후손에게는 ‘죄의 상속’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직시할 책임이 있을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과 역사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개인을 처벌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하영 사건이 씁쓸함을 남기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부채를 현재의 개인에게 떠넘기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서울=이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