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미경중'의 종말과 새로운 생존 공식
탈냉전 이후 한국외교를 지탱해 온 핵심 공식은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의지한다"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전방위로 치열해지면서 이 공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양국 모두 한국에게 명확한 태도를 요구하며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수동성에서 벗어나, 한국 스스로 외교적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박병관 연구위원이 1일 발표한 '미·중 전략경쟁시대 한국의 對중국 외교와 전략 공간 확장'의 핵심 내용을 세 가지 포인트로 정리한다.
결정할 수 있는 '능력'과 움직일 수 있는 '무대'
보고서는 한국 외교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전략적 자율성'과 '전략 공간'이라는 두 가지 단어를 쉽게 비유해 설명한다.
▲전략적 자율성(내적 역량): 강대국의 압박이 있어도 우리 국익에 따라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스스로의 힘(능력)’
▲전략 공간(외적 조건): 그 능력을 실제로 발휘해 움직일 수 있는 '선택지의 범위(무대)’
한국과 미국, 중국 간 관계를 들여다보면 이 차이가 뚜렷해진다. 미국과의 관계는 안보동맹을 바탕으로 하기에, 그 동맹 속에서 우리 목소리를 얼마나 낼 수 있는가하는 자율성이 중요하다. 반면 중국과의 관계는 깊은 경제적 연결로 묶여 있어 중국에만 지나치게 의지하는 구조를 깨고 다른 대체 시장과 대안(무대)을 만들어두는 '전략 공간의 확장'이 과제다. 즉, 대안이 많아야 중국의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중관계의 현실: 겉으론 협력, 속으론 리스크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2025년 말 기준, 교역액 2,727억 달러)이다. 그러나 정치·안보적 갈등이 생기면, 중국은 언제든 이를 빌미로 '비공식 경제 보복'이라는 무기를 쓰고 있다. 과거 사드(THAAD) 배치 당시 관광 제한, 롯데마트 영업 정지 등으로 피해를 준 사례가 대표적이다.
올 1월 이재명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해 한중정상회담을 가지며 관계는 일시적인 안정세로 접어들었으나, 구조적 제약은 여전하다. 이는 미·중 경쟁이나 대만 문제 같은 거대한 폭풍 속에서 잠시 갈등을 관리한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는 어렵다. 중국은 한국을 이웃나라가 아니라 자신들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경계선상의 국가'로 보고 경계하며 압박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생존을 위한 5가지 출구
보고서는 한국이 강대국 패권 경쟁 속에서 종속국이 아닌 '선택을 설계하는 주체'가 되기 위한 5가지 전략을 제시한다.
1. 외교 다변화: 일본, 아세안, 인도, 중동, EU, 글로벌 사우스 등 다양한 국가들과 네트워크를 넓혀 미·중 두 나라에 편중된 부담을 분산시켜야 한다. 2. 공급망 다원화: 특정 부품이나 핵심 광물을 중국에만 의존하는 구조를 깨야 한다. 타이완은 대중국 투자 비중을 과거 84%에서 최근 3%대까지 파격적으로 줄이며 탈중국과 시장 다변화에 성공했다. 기업들의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3. 기술 주권 확보: 인공지능(AI)이나 차세대 배터리 같은 첨단기술 경쟁력을 독보적으로 키우면, 중국도 한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되며 이를 외교 카드로 쓸 수 있다.
4. 한미동맹의 균형적 관리: 안보는 한미동맹을 축으로 확실히 지키되, 기후변화나 보건 같은 분야에서는 중국과도 손을 잡는 '분야별 분리 대응'이 필요하다.
5. 한일관계 레버리지 활용: 이웃국가 일본과의 안보·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이를 대중국 외교에서 한국의 몸값을 높이는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전략을 실천하기 위한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 먼저 외교·안보·산업·과학 등 여러 부처가 따로 놀지 않도록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산하에 차관급들이 모이는 '경제안보 전략조정위원회(가칭)'라는 컨트롤타워를 세울 필요가 있다. 아울러 시간 흐름에 따른 구체적인 3단계 실행 계획(로드맵)도 세워야 한다. 보고서는 단기(1~2년), 중기(3~5년), 장기(5~10년) 로드맵을 가동하라고 조언했다.
끝으로 보고서는 대외메시지를 낼 때는 "반중(反中)이 아니라 한국의 경제안보를 지키기 위한 다변화 조치"임을 다듬어 발신해야 불필요한 마찰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결국 한국 외교가 성공하려면 스스로가 움직일 수 있는 무대를 먼저 디자인해 나가는 국가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