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 ‘음식’임을 깨달은 이영덕. 그 음식이라는 주제 안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했다.
그렇다면 음식업 가운데 무엇을 택할 것인가?
한식, 일식, 중식, 양식… 무수한 선택지 속에서 고민한 것은 ‘확장성’이었다. 맛집 하나 차리는 사업은 애초부터 머릿속에 없었다.
왜 도시락이었을까?
“수백, 수천 개의 점포를 거느리고 세계로 뻗어나가는 ‘기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꿈은 클수록 가치가 있다고 믿었죠.”
그 해답을 찾은 곳은 일본이었다.
“일본 외식 프랜차이즈들을 조사해보니, 점포수가 제일 많은 업종이 도시락이더군요.”
산업구조와 소비문화가 한국보다 한발 앞서가는 일본에서 도시락은 누구나 즐겨먹는 일상식(日常食)이었다. 그리고 도시락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치킨집은 닭을 팔고, 피자집은 피자를 팔지만 메뉴 확장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하지만 도시락은 달랐다.
“확장성의 비밀은 도시락 ‘용기(容器)’에 있습니다. 각각의 칸막이마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 그 무엇이든 담을 수 있으니까요. 메뉴의 무한 확장성을 품은 플랫폼이 도시락인 거죠.”
해외에 나가면 그 나라 음식을 담으면 된다. 즉, 전 세계 어디서나 통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처럼 그는 도시락이 다른 외식업과 본질적 차이가 있음을 꿰뚫어보았다. 그리고 직감했다.
‘이게 바로 내가 꿈꾸던 사업이다’
문제는 한국 시장이었다. 도시락 사업을 한다니 주변 모두가 뜯어말렸다. 1990년대 초까지도 한국에서 도시락은 ‘돈 주고 사 먹는 음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풍날 김밥, 겨울철 교실 난로 위에서 데워먹는 양은 도시락. 그게 전부였다.
그 시절 도시락은 ‘집에서 싸가는 것’이라는 관념이 지배했고, 외식 프랜차이즈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다. 하지만 이영덕은 달랐다. 그는 ‘도시락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블루오션’이라 확신했다.
「혼케가마도야」에서 만난 인연
배울 데가 한국에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고베(神戸)에 본사를 둔 도시락 프랜차이즈 ‘혼케가마도야(本家かまどや)’였다. 정보를 수집하던 중, 한 지인에게 귀띔을 들었다.
“그 회사 창업자들이 재일교포 2세라더군요.”
그 한마디에 곧장 고베로 날아갔다. 약속도 없이 본사 근처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어 대표님을 찾았다. 느닷없는 전화였음에도 수화기 너머서 “오십시오”라는 응답이 나왔다.
“한국에서 일부러 찾아왔다니까 너무나 반가워하더라고요. 혼케가마도야는 사장님, 전무님, 상무님 세 분이 공동 창업자인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상무님이 제 서울대 법대 선배더군요.”
뜻밖의 인연이었다. 가마도야 경영진은 같은 재일교포로서 ‘조국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이영덕의 눈빛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렇게 도시락 사업의 첫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뭐든 알려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보세요.”
“혹시 로열티나 대가는 어떻게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런 건 필요 없소. 같은 교포끼리 돕고 살아야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로열티도 기술료도 없이 일본 최고의 도시락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전수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행운이었고,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때부터 이영덕은 고베 본사와 교토(京都) 직영점을 오가며 현장에서 도시락 사업의 A부터 Z까지를 몸으로 익혔다.
“음식업은 머리로 배우는 게 아닙니다. 현장이 곧 교과서죠.”
직접 주방에서 도시락을 만들며 조리 동선과 시간, 포장 프로세스를 익혔다. 그는 같은 모국 유학생 출신이자 교포 후배 이강영 씨를 스카우트해 일본 연수를 보내기로 했다.
“처음엔 한두 달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강영 씨가 ‘아직 멀었습니다’라며 돌아오지 않더군요. 결국 6개월을 꼬박 채워 배운 다음에 귀국했습니다.”
이강영 씨가 돌아오자, 이제 진짜 한국 시장 진출을 향한 준비가 시작됐다. 그렇게 ‘한솥도시락’의 첫 점포의 문을 열기 위한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제8화에서 계속)
[서울=이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