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개 가맹점, 164개 협력업체, 시장점유율 50% 이상.
‘한솥(HANSOT) 도시락’은 대한민국 도시락 업계의 선도 기업이다.
그 규모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창업 33년, 서민들의 든든한 한 끼를 책임져온 도시락의 대명사가 바로 한솥이다.
‘한솥’의 창업주 이영덕(李英悳) 회장은 재일동포 2세다. 그는 성공한 기업가이기 이전에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인물이다. ‘교토의 아들’이었던 그의 운명을 바꾼 건, 아버지의 단호한 한마디였다.
“가서 한국말을 배워라.”
이영덕의 시작,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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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 때 아버지와 함께 |
현해탄 건너온 아버지, 교토 중심부에 터를 잡다
이영덕 회장은 교토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하나인 가와라마치 로카쿠(河原町 六角)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고(故) 이판술(李判述)씨는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全羅南道 谷城郡 玉果面)의 농가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도회지인 여수로 나간 아버지는 잡화상점 급사로 취직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온갖 심부름을 도맡았다고 한다. 일솜씨가 있고 바지런한 아버지를 눈여겨본 일본인 주인은 해방 후 함께 현해탄을 건너자고 제안했다.
이영덕 가문의 일본살이는 그렇게 시작됐다. 알음알음 돈을 모은 아버지는 일본사장으로부터 독립을 했다. 그리고 홋카이도(北海道)부터 규슈(九州)까지 일본 전국을 일주하면서 정착할 곳을 찾았다. 그때 가장 마음에 내켰던 도시가 바로 교토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도 능숙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한눈에 봐도 한국인 티가 팍팍 났죠.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기가 셌어요. 단단했고 카리스마도 있었죠. 그래서인가 아무도 쉽게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배짱 하나는 따라올 자 없던 아버지는 가와라마치에 자그마한 점방을 차렸다. 시계와 보석류를 취급하는 가게로 전당포도 겸하고 있었다. 당시 교토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시계 점방은 일본인보다는 미군을 상대로 한 장사였다.
전후(戰後)라서 일본인들은 가난했다. 그런데 언어도 서툰 아버지가 점령군인 미국인들을 상대로 시계를 팔았다니... 영덕은 돌이켜봐도 그 사실이 놀랍고 신기했다.
어쩌면 아버지에게는 타고난 사업수완이랄까, 동물적인 사업적 감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확실한 기억 몇 개는 남아 있다. 전화번호 수백 개를 통째로 외우고, 전화기를 붙들고 살면서 정보를 캐던 아버지의 모습은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영덕이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캐딜락을 몰던 아버지는 언제나 당당했다. 뭔가 울퉁불퉁했지만, 이역만리 교토 땅에서 억척스럽게 집안의 터전을 일구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면서 어린 소년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워갔다.
"차별받아 본 적 없다“
“일본 살면서 ‘조센진’이라든가 차별을 받아본 기억이 없어요. 오히려 우월감을 갖고 살았죠.”
이런 당당함의 배경에는 어머니의 존재도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교포 2세인 어머니 성길자(成吉子)씨는 세련되고 지적인 여성이었다. 집안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어머니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음식 솜씨도 뛰어나 요리를 하는 날에는 넉넉하게 만들어서 이웃들에게 나눠줬다. 동네에서 어머니는 ‘아줌마들의 리더’였다.
아들에게 언제나 품위와 예절을 강조하면서 피아노, 노래, 그림 등의 교양을 가르쳤던 어머니. 덕분에 영덕은 자유분방하면서도 반듯하게 자라났다. 그래서였을까, 학창 시절 내내 1등과 반장을 도맡았다. (계속)
[서울=이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