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수수께끼를 풀자"
바이올린 소리비법 찾기 대모험
홍난파 친구 시노자키 선생과의 인연
진창현은 이 만남을 계기로 시노자키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학교 근방으로 이사를 왔다. 선생이 자신이 가르치는 어린 학생용 바이올린을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곳이 지금까지 50여 년간 살고 있는 센가와로 여기에서 진창현은 쓸모없는 폐자재를 명기로 탈바꿈시켰다.
시노자키 선생과의 인연이 시작되고 2년쯤 지난 어느 날 선생은 뜬금없이 진창현에게 물었다. “기미 코란하 싯테루노?(君, 洪蘭坡 知ってるの. 자네 홍난파 아는가?)”
그때 진창현은 홍난파가 조국 한국과 일본에서 이름을 날린 천재 작곡가인 줄 모르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진창현에게 선생은 도쿄음악대학 동기생 홍난파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함께 하숙을 했을 정도로 절친한 친구 사이로 선생은 홍난파가 지은 곡을 들고 아사쿠사(淺草)로 나가 바이올린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솔직히 선생처럼 고명한 일본인이 왜 보잘것없는 나에게 잘해줄까 의아했습니다. 사연을 듣고 보니 선생은 대학시절 만난 조선학생들과의 교류로 조선인에게 친밀감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고 애환까지도 알고 계셨던 겁니다. 제 바이올린 제작의 운명을 바꿔준 인연은 선배 재일동포들이 맺어주신 것이더군요.”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지독한 가난의 늪에서 탈출하고, 시노자키 선생과 대당 3000엔으로 시작한 바이올린 가격은 7000엔까지 올랐다. 생활이 정상궤도에 오르면서 2남1녀의 자식도 태어났다. 그렇게 행복은 계속될 줄 알았다.
간첩 혐의로 끌려가 고문 받다
그러나 그에게 다시 한번 큰 시련이 찾아왔다. 사건은 한일 국교가 수립된 뒤 조국을 찾았을 때 벌어졌다. 1968년 5월 도일 25년 만에 고향인 경북 김천의 이천(梨川)마을을 찾아간 진창현을, 이복형이 북한 스파이로 밀고한 것이다.
“그땐 참 운이 없었어요. 그해 초 북한공비들이 청와대로 침투(1·21사태)하고 푸에블로호 사건이 있어 정국이 뒤숭숭했잖아요. 하지만 고문을 받으며 겪은 신비한 체험은 제 바이올린 제작의 전기가 되었습니다. 의식이 흐릿해지며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 여태껏 살아온 풍경들이 필름처럼 떠올라 지나가는 겁니다.”
진창현은 얼굴이 물속에 거듭 처박히고 온몸에 전기가 관통되는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차라리 일본으로 국적을 바꿨더라면 이런 수난은 겪지 않았을 텐데….’일본에서 온갖 서러움과 조롱을 당하며 한국 국적을 지켜온 그에게 조국은 잊지 못할 상처를 안겨줬다. 일본으로 돌아온 진창현은 매일 밤 악몽과 환청에 시달렸다. 그렇게 삶의 정체기를 1년 가깝게 보냈다.
이상하게도 생사가 갈리는 듯한 극한 체험을 한 다음, 어린아이처럼 왕성한 호기심이 발동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더 좋은 소리, 더 아름다운 모양을 가진 바이올린을 만들겠다는 호기심은 나날이 커져갔다.
“실험의 모토는 ‘감각 기능을 최대한 키우자’였어요. 눈과 귀, 손과 코로 물질을 탐구하고 그것도 안 되면 혀를 썼습니다. 그런 게 무슨 소용이냐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자꾸 반복하다 보면 오감(五感)이 예민하게 발달합니다.”
진창현은 괴이한 실험을 거듭했다. 모유만 먹는 큰아들의 황금색 변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빛깔’이라 생각해 바이올린에 똥칠을 했고, 석유에서 나는 특유의 붉은 빛깔을 추출하려고 실험하다 폭발사고도 일으켰다. 그리고 전신에 화상을 입은 채 거리로 뛰쳐나오는 바람에 자폭 테러범으로 오인을 받기도 했다. 이런 무모한 듯한 시행착오들은 진창현 바이올린이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수수께끼에 다가가는 열쇠가 되었다.
“아름다운 소리는 공기의 진동이 강하고 물리적 운동량이 많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초음파라고 불리는 것이죠. 여름철 매미가 날개를 비비며 내는 소리,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바로 초음파가 담겨 있습니다. 바다 게들은 등딱지를 부딪쳐 초음파를 발산하죠. 키토산이란 분자덩어리가 초음파를 내는 매개물질이에요. 이런 자연의 소리들을 찾아내면 곧바로 바이올린 제작에 응용해봅니다. 가령 게딱지를 잘게 쪼개서 바이올린에 발라보는 것이죠.”
새벽 3시에 시작하는 일과
그는 비록 인간 스승을 만나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자연이라는 더없이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아침에 일어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저 아름다운 소리를 바이올린에 담아낼 수 있다면…’ 하고 고민했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주저하지 않고 그날로 실험을 했다. 진창현 바이올린은 장인의 숙련된 기능으로 다듬어진 것도 아니고 우연히 발견한 비법의 결과물도 아니다.
생전에 진창현은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에 일과의 대부분을 쏟았다. 취침 저녁 8시, 기상 새벽 3시. 그의 기획은 모두 새벽녘에 이뤄진다. 시작은 포근한 이불 속에서 상상하는 것이다. 하루 20분씩 이불 속에서 하는 상상은 좋은 아이디어들을 생산해내는 보물창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센가와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운동을 하고, 다음엔 거실 의자에 앉아 독서를 한다.
그가 일본 내 바이올린 제작자 500명 가운데 ‘넘버원’으로 인정받고 세계에서 다섯 명밖에 없는 무감사(無監査) 장인의 반열에 오른 건 부단한 학습과 연구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는 더 많은 책을 읽을 욕심에 ‘속독법 교본’을 수차례 독파했다. 진창현의 독서는 화학, 물리학, 수학, 미술, 영문학, 일본 고전, 수필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만약 남이 만든 것과 비슷한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을 만들었다면 저 같은 재일동포는 경쟁력을 갖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차원이 다른 월등한 악기여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남보다 앞선 지식들을 축적해야 실험도 해볼 수 있고, 남이 따라오지 못하는 새로운 기술도 연마할 수 있는 겁니다.”[서울=이민호]
* 지원 : 「재외동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