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방적왕, 선구자... 인간 서갑호
1962년에 대사관 기증
서갑호 사장이 아자부 땅을 한국정부에 기증한 건 1962년 8월 15일이다. 광복절 기념식 재일동포 참관단으로 방한, 이날 기증행사에는 박정희 국가최고회의 의장 등 정부 관계자와 재일민단 간부들이 함께했다.
“(정부의) 국가재건 의지에 믿음을 가졌습니다.”(在阪100年史)
그날의 장면을 생생히 전해주는 사진 3장이 있다. 1장은 박정희와 서갑호 두 사람이 기증서약서를 맞잡고 있는 것이고, 다른 1장은 권일 민단 단장이 기증서약서를 펼쳐들고 낭독하는 장면이다. 서갑호 집안에는 박정희, 서갑호 부부와 그들의 자녀가 슬리퍼를 신고 찍은 가족사진 같은 이미지도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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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 민단중앙본부 단장이 서갑호 사장의 주일한국대사관 부지 기증서약서를 낭독하고 있다.(1962.8.15 서울) |
기증식장은 눈물바다였다. 나라 잃은 일제 때 홀로 바다를 건넌 시골소년이 대사업가로 변신해, 상상조차 힘든 막대한 재산을 제 나라를 위해 바쳤으니... 어느 누가 감동하지 않으리.
그로부터 석 달 뒤 1962년 11월 1일, 아자부 땅은 주일대한민국대표부로 국유화된다. 그리고 1964년 2월 26일 토지 및 건물 소유권 일체가 ‘대한민국’이름으로 이전등기된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1970년 6월 서 사장은 도쿄 시로카네(白金) 대지를 대사관저용으로 매입해서 다시 나라에 기증했다.
현재의 주일대한민국대사관은 대사관 청사와 관저가 붙어 있는데, 그건 기존 아자부 대지에 일본으로부터 등가 교환받은 시로가네 관저가 합쳐진 것이다. 그래서 아자부 한국대사관의 면적은 당초 2천 평 남짓에서 3,091평(1만218㎡)으로 확장됐다.
방적왕, 선구자... 인간 서갑호
내년이면 서갑호 씨가 세상을 떠난 지도 50년이다. 모두에게 잊힐 법한 긴 세월이다. 하지만 여전히 재일동포사회, 한국인들 사이에서 서갑호란 이름은 기억되고 있다. 주일대사관 기증자, 방적왕, 모국투자의 선구자라는 칭찬부터 비운의 사업가, 패배자라는 뒤끝이 남은 호칭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숱한 화제를 뿌렸던 그의 생애를 그렇게만 불러도 되는 것일까? 그러기에는 묻혀있는 서갑호 스토리가 너무나도 많다.
오사카 민족학교 금강학원을 지탱해온 사실상의 학교 설립자였고, 금강학원이 대한민국 제1호 재외한국학교로 인정받은 배경에 그가 있었다. 조선인 징용노동자가 많았던 효고현 다카라즈카(宝塚)에 한국학교를 세우는 데에도 그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다카라즈카한국학교는 폐교됐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1세는 없다. 고향 울산의 삼동초등학교, 밀양중고등학교 시설을 짓는데도 힘을 보탰다. 육영가 서갑호의 모습은 지금까지 조명된 바가 없다.
50~70년대 민단 오사카본부에 제일 많은 돈을 내는 후원자였음에도 민단 역시 시설 어디에도 그에게 감사하는 표식조차 없다. 도쿄 대사관 때문에 가려졌지만, 오사카총영사관도 감사에 소홀한 건 마찬가지다. 서갑호 씨는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때 오사카총영사관 임대료를 지원한 데 이어, 70년대 영사관 건설운동 때도 사재를 털었다. 사카모토방적 도산이라는 절체절명의 사고가 일어났음에도 그는 조국을 외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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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5월 주오사카한국총영사관 청사 재일동포 협찬자 명부. 서갑호 사장이 6명 협찬자 중 맨앞에 올라있다. |
서갑호라는 사람에 대해 모두가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모두가 그를 알지 못한다. 망해버린 전설의 재벌쯤으로 기억할 뿐, 그가 어떻게 천문학적 재산마저 기꺼이 사회를 위해 내놓았는가에 대한 관심은 없다.
세상에는 부호(富豪)소리를 들으면서도 정작 쓰는 방법을 모르는 스쿠루지형 인간들이 넘쳐난다. ‘버는 건 기술, 쓰는 건 예술’이란 말도 있지만, 사회공동체를 위해 재산을 쓴다는 건 자기욕심을 버린 무욕자(無欲者)의 영역이다.
가족과 이웃, 사회와 나라를 향한 서갑호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일, 그는 왜 그 순간 기증이란 선택을 했는가 그걸 알아야 전설이 아닌 인간 서갑호가 보일 터이다. 오사카에 살고 있는 셋째 딸 경남(景南)씨의 증언에서 서갑호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다.
“아버지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지위가 높든 낮든 언제나 낮은 자세로 만났어요. 사람을 화(和)로서 대하라고 우리들(3남3녀 자녀)에게도 귀가 닳도록 말했죠. 회사 수위와 여공들과 가족처럼 지냈고, 이름만 대도 다 아는 유명인을 만나서도 「힘내라」고 용기를 주었어요. 자식들에게 인자한 아버지, 아내에게 반찬투정 안하는 남편, 남 욕하지 않는 사람이었죠. 누구에게나 똑같은 사람, 그분(서갑호)의 사람을 대하는 자세였어요.”(2024.12월 인터뷰)
-끝- [서울=이민호]
* 지원 : 「재외동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