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재일동포 모국투자의 효시
한국사람으로서 일본 재계의 톱클래스에 오른 서갑호 사카모토방적 사장. 그는 일본 주류도 인정하는 재벌의 위치에 올랐지만, 가난한 이웃과 조국을 잊지 않았다.
국교가 단절돼 있던 1950년대에 이미 모국투자를 하고 있었고, 고향마을과 친지들에게는 생활자금을 보태고 있었다. 당시 기록은 그의 묘비에 1956년 3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산업발전유공 훈장을, 1961년 2월에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공익포장을 받았다는 정도가 남아 있다. 이때 서 사장이 한국에서 어떤 사업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는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가 일약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때는 1962년 8월이었다. 그해 8.15광복절 기념식의 재일동포 참관단으로 방한, 정부에 본인 소유의 도쿄 대지와 건물을 기증한 것이다. 그것도 일본 최고의 노른자위 땅으로 꼽히는 미나미아자부 대지를 통째로 나라를 위해 써달라 했으니 말이다.
이듬해 서갑호 사장은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섰다. 1963년 2월, ‘태창방직(泰昌紡織)’을 인수하면서 한국산업은행에 미화 100만 달러를 송금한 것이다. 국민소득 80달러 남짓인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에 환상속의 거액이 단박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서갑호의 송금은 최초의 대규모 재일동포 재산반입이었으며, 또 최초의 해외자본 유치였다. 한국경제사에 새 역사를 썼기에 ‘서갑호=모국투자의 효시’로 불렸다.
공장부지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일대 9만 평. 회사 이름은 서갑호의 일본식 이름 ‘사카모토’를 따라 ‘판본’이라 했다가 1967년에 ‘방림(邦林)방적’으로 고쳤다. 이때부터 그는 방림방적 서갑호로 불렸다.
 |
1963년 서갑호 씨가 설립한 영등포 <방림방적> |
모국투자는 성공적이었다. 자본 뿐 아니라 기술도입에도 적극적이었다. 일본 사카모토그룹의 기술력과 인력관리 노하우를 그대로 갖고 왔다. 한국 입장에서도 일본 1위 사카모토브랜드가 붙은 제품이 해외로 수출되니, 외화획득은 물론 국위선양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서 사장은 70년대 모국투자 확대를 결심하고 경북 구미공단에도 진출한다. 연재 첫머리에 등장한 화재로 소실된 ‘윤성방적’이다. 1973년 1월 법인인가를 받고 그해 9월부터 가동을 시작한 세계 최첨단 방적기업이 한 순간의 불로 인해, 불과 넉 달 만에 모든 것이 날아가고 말았다.
윤성방적 투자액은 정부기록으로 6,947만 달러. 화재로 인한 피해는 방적기 13만4,784추와 직포 시설 3,000대, 피해금액만 170억3,100만 원(현 시세 1조 원 추정)에 달했다. 실내면적만 2만 평인 대공장에 켜켜이 쌓여 있던 완제품, 원면이 모두 화마로 사라지고 말았다. 생산시설은 마치 원자폭탄을 맞아 철골만 앙상하게 남는 듯했다.
서갑호 사장은 당당했다. 화재 이튿날인 1월 24일 기자회견을 자청, 재기의 의욕을 보였다.
“조만간 복구작업을 개시할 것입니다. 불타버린 기계는 고철로 폐기처분하고, 곧 새 기계를 발주하겠습니다. 늦어도 1975년 상반기 중에 복구를 완료할 계획입니다. (윤성방적) 종업원 1500명의 고용도 모두 보장할 것입니다.”
알몸으로 시작한 일본살이에서도 숱한 좌절을 겪었지만 언제나 뚝심으로 다시 일어났던 서갑호. 그의 표정에는 모국에서도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넘치고 있었다. [서울=이민호]
* 지원 : 「재외동포청」